일요일 오후, 한가롭게 빨래를 개다가 늘어난 팬티 한 장을 발견했다. 쓰레기통에 넣으려던 순간, 내가 제일 사랑했던 한 사람과의 추억이 떠올랐다.
엄마 몰래 립스틱을 얼굴에 덕지덕지 바르며 한창 말썽 피우던 미운 일곱 살, 학교를 일찍 들어간 나는 또래 친구들보다 키도 작은데다 유난히 어려보였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수업이나 따라가겠냐며 염려했지만 나는 의젓하게 학교생활을 썩 잘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아침, 여느 때처럼 등교하여 한쪽 실내화를 막 갈아신을 무렵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다.
실내화를 두고 화장실로 뛰어가자니 친구들이 내 실내화를 가져갈 것만 같고, 한쪽 실내화를 마저 갈아신고 가자니 오줌이 나올 것 같고…
머리가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상의도 없이 몸이 먼저 결정을 내렸다. 오줌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는 게 아닌가. 바지는 축축하게 젖어갔다. 당황스러웠다. 어떡하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해결해보자. 일단 교실로 들어가자. 맨 앞자리 내 책상이 오늘따라 멀게만 보였다.
드디어 도착. 그래 난 할 수 있어. 두 눈을 질끈 감고 축축한 엉덩이를 의자 위에 뭉갰다. 고개를 푹 숙였다. 책상 위로 갑자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친구들이 나를 보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선생님, 얘 운대요” 선생님이 “너 무슨 일 있니? 왜 울어? 이리 와봐!”
쭈뼛쭈뼛 일어나 선생님께 다가갔다. 아이들은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선생님께 귓속말을 했다.
“선생님, 저… 오줌… 오줌 쌌어요…” 선생님이 큰소리로 화를 내셨다.
“뭐?! 오줌 쌌어? 넌 다 큰 애가 오줌을 싸고 그러니? 다 젖어서 어떻게 수업하려고… 엄마 빨리 학교로 오시라고 해!”
용기를 내 비밀을 말씀드린 건데, 오히려 친구들 앞에서 다 말해버렸으니… 너무나 창피했다.
친구들은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우리 엄만 일 나가셔서 못 오시는데… 선생님이 미웠다. 친구들도 미웠다. 이 끔찍한 상황에서 생각나는 사람은 단 한 사람, 우리 할머니였다.
“할머니 나 바지에 오줌 쌌어… 다 젖어버렸어. 학교로 빨리 팬티 가지고 와야 해… 알았지?” 흐느끼며 전화를 했다.
교실에서 할머니를 기다리던 한 시간은 내겐 천 년과 같았다. 젖은 내 바지가 금방이라도 꽁꽁 얼어서 의자에 붙을 것만 같고 점점 더 차갑게 느껴졌다.
내내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데 어느새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창문 너머로 나타난 할머니는 슈퍼맨보다 더 멋지게 보였다. 할머니를 보니 서러웠던 울음이 터졌다. 할머니는 말없이 내 눈물을 닦아주셨다.
손을 꼭 잡고는 화장실로 데려가시더니 문을 잠그고 내 몸을 정성스레 씻겨주었다. 물은 차가웠지만 할머니의 손이 닿는 곳마다 따뜻한 물로 변해갔다. 행복한 순간이 찾아왔다. 다 씻고 수건으로 닦고 나니 할머니가 팬티를 꺼냈다. 와 팬티다!
팬티를 허겁지겁 입었다. 그런데 팬티가 쑤욱 하고 흘러내렸다. 다시 입었다. 역시 쑤욱 하고 흘러내렸다. 응? 왜 이러지?
자세히 보니 그건 내 팬티가 아니었다. 사이즈 100의 어마어마하게 큰 팬티! 그건 바로 뚱뚱한 할머니 팬티였다. 급하게 오시는 바람에 잘못 가져오고 만 것이었다.
환했던 내 얼굴은 어둡게 변했고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으앙~ 할머니~ 할머니 팬티 가져오면 어떡해. 잘 보고 가져와야지! 이게 뭐야… 나보고 어떻게 이거 입으라고…” 할머니에게 소리치며 씩씩대었다.
“일단 입고 집에 와 다시 갈아입자. 정말 미안해”
“몰라! 할머니도 미워… 빨리 가버려…”
난 너무나도 큰 할머니의 팬티를 입고는 끝까지 분을 참지 못하여 할머니께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매정하게 돌아섰다.
혼자 쓸쓸하게 돌아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안쓰럽게 보였지만 할머니가 용서되지 않았다. 교실로 들어가서도 나는 흘러내리는 팬티를 부여잡으며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20년이 흘러 스물일곱 살이 된 나는 다시 선택한다. 버리려고 했던 늘어난 팬티를 버리지 않기로 말이다. 늘어나 쓸모없는 팬티지만 세상에서 제일 사랑했던 우리 할머니를 떠올리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할머니 살아생전에 예쁜 팬티 한 장 선물해드리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지금은 안길 수 없는 할머니의 넓고 따뜻한 품도 너무 그립다.
유지희/회사원
2010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