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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 방망이를 만나다' - 최영희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2-01-20 조회 3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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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여 년 전 동대문 앞 길거리에서 방망이를 깎아 파는 한 노인이 있었다. 옷감의 구김을 펴는 이 방망이는 당시 부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물건이었다.

아내가 새로 방망이 하나를 사다 달라했다. 남편은 퇴근길에 길거리에서 방망이 깎는 노인에게 방망이를 하나 깎아 달라고 했다.
그는 대강 나무를 깎아 후딱 만들어주겠거니 하고 서서 기다렸다. 그런데 이 노인이 그 하찮은 물건을 갖은 정성을 다해 만들며 시간을 잡아먹는 게 아닌가.
기차로 집에 가야 하는 그는 차시간이 다 되자 재촉을 한다. “대강 만들어주시오. 그만하면 됐소.”

그러나 노인은 물건을 이리보고 저리 보며 손질을 더 했다. 그가 보기엔 이미 다 된 방망이를….
화까지 내며 달라 해도 그 노인은 도리어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재촉한다고 생쌀이 밥이 되나. 다른 데 가서 사우. 난 안 팔겠소.”
남자는 이미 차도 놓친 터라 “그럼, 마음대로 깎아 보시오.” 한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으면 되나.”
노인은 이리 보고 또 저리 보며 방망이를 다듬었다. 종국에는 아예 무릎 위에 올려놓고 곰방대에 담배를 피워 물고 한참을 보고 난 뒤 내어준다.

차까지 놓친 남자는 너무도 화가 나고 불쾌했다. ‘그까짓 방망이’를, ‘길에서 방망이를 깎아 파는 주제에’.
그러나 집에 가져가 아내에게 주니 아내는 이렇게 잘 만든 방망이는 처음이라며 감탄한다. 그제야 남편은 ‘아 그 노인이 이리 좋은 물건을 만드느라 그랬구나. 그 멸시를 견디어내며 물건 하나를 이리 잘 만들어냈구나.’ 깨닫는다.

방망이를 사간 그분, 수필가 윤오영 선생은 40여 년이 지난 후 이 이야기를 글로 쓰게 된다.
‘벌써 40여 년 전이다. 내가 갓 세간난 지 얼마 안돼서 의정부에 내려가 살 때다. 서울 왔다 가는 길에, 청량리역으로 가기 위해 동대문에서 일단 전차를 내려야 했다.
동대문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방망이를 깎아 파는 노인이 있었다. 방망이를 한 벌 사 가지고 가려고 깎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그의 수필 ‘방망이 깎던 노인’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윤오영 선생을 재수시절 학원에서 만났다. 그분은 집안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만 졸업했지만 독학으로 누구도 따르지 못할 학문의 경지에 이르셨고, 그분의 진가를 알게 된 모 고교에서 그분을 교사로 모셔 갔다.

그러나 5·16후 무자격자라 하여 학교를 그만두시고 대입학원에서 강의를 하시게 되었다. 그 살벌한 지식시장인 학원에서 강의 첫날 그분은 우리들에게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셨다.
“이제껏 국어시간에 문제풀이를 위해 외운 지식들은 독이었다. 나는 이제껏 먹은 독을 없애주는 해독제 역할을 하겠다.”

그분은 일 년 내내 우리들에게 한 글자도 가르쳐주지 않고 우리 스스로 ‘읽고 요약하는’ 일만 시키셨다. 우리에게는 읽고 요약하게 하고 당신은 그야말로 쉬시며 노셨다. 그런 그분을 우리 모두는 너무나 미워하고 원망하고, 경멸했다.
그러나 그 해 입학시험을 보며 우리는 그분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 그분의 그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수업이었음을 점수로 확인한 것이었다.
더욱 우리의 수업거부와 멸시어린 시선, 언동에도 끄떡하지 않으셨던 신념에 찬 그 꿋꿋함은 ‘방망이 깎던 노인’의 그것과 같았다.

후일 국어교사가 된 나는 이 감명 깊은 가르침을 수업 첫 시간 학생들에게 꼭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윤오영 선생 같은 수업을 하진 못했다. 그러고 싶었지만 용기도 없고 여러 가지 눈치를 보느라 아이들에게 독을 먹였다. 그러나 무엇이 좋은 공부법인가와 용기와 신념에 대한 그 이야기는 꼭 들려주었다. 

그 중 한 여학생은 그 이야기를 집에 가서 말이 잘 통하는 엄마에게 해주었다.
<월간독자 Reader>를 만드는 그 어머니는 딸의 말을 유심히 들었고 훗날 학교를 그만둔 나에게 그 이야기를 쓰게 하여 잡지에 실었다.
교직을 접으며 해마다 수백 명에게로 전해지던 윤오영 선생 이야기의 맥이 끊기는 것 같아 아쉬웠는데, 글로 써서 여러 사람에게 전해진다니 그것만으로도 기쁘고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글이 나가고 얼마 후에 윤오영 선생의 모교 교사에게서 학생들에게 보여주려고 더 많은 자료를 찾고 싶다는 전화가 왔다.
나는 나의 예전 동료교사를 통해 그의 대학동창이었던 윤오영 선생의 아드님께 그 이야기를 전했다.
아드님은 흔쾌히 만남에 응해주셨고 윤오영 선생의 유품 몇 점을 기증해주시겠다고 했다.
방망이 깎던 노인’의 그 방망이, 수필 ‘석류장’에 나오는 석류나무로 만든 지팡이, 친구 피천득 선생이 선물한 담배 파이프 등.
아드님은 그 유품들을 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시겠다고 했다. 사학의 명문인 그 학교엔 100주년을 기념해 만든 역사관이 있었고 그곳에 그 방망이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80여 전 길바닥에서 한 이름 없는 노인이 깎은 방망이가 이 나라 동량의 마음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없이 가르칠 것을 생각하니 감격스러웠다.
나는 그렇게 해서 이 방망이를 보게 되었고, 손수 쓰다듬어 보기까지 했다.
정말이지 참 잘 만든 방망이였다. 쓰임새에 꼭 맞게, 손에 잡기 편하고 옷감에도 무리가 가지 않게 얄상하고 미끈하게 잘 빠진 방망이였다.
나도 어릴 때 집에서 할머니와 어머니가 방망이질하는 것을 보며 자랐고, 몇 번 두들겨본 경험이 있는데 이렇게 잘만든 방망이는 처음 보았다.

80년의 세월을 넘어 내 앞에 온 방망이. 너무도 감격스러워 한참을 어루만졌다. 오랫동안 그 촉감, 그 두께, 그 모양이 그 정성이 내 머릿속에, 마음속에 잘 자리 잡혀 있도록. 순간 내 앞에 그 방망이 깎던 노인이 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동대문 지붕 추녀를 바라보고 섰다.’ 방망이를 다 깎고 난 후의  노인에 대한 윤오영 선생님의 표현이다.


최영희/<월간독자 Reader> 편집위원

2009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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